마띠에르(Matière) 기법의 역사적 발전과 현대적 적용
마띠에르 기법은 회화 표면에 형성된 물리적 질감을 통해 작가의 개성과 예술적 의도를 구현하는 핵심적 표현 방식으로, 20세기 앵포르멜 운동을 기점으로 현대 미술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본 글은 유화 재료의 물성적 실험에서 출발한 이 기법이 디지털 판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층적 진화 과정을 추적하며,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오트 파트(hautes pâtes)에서 한국 현대작가들의 혁신적 접근에 이르는 기술적 확장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Ⅰ. 마띠에르의 개념적 정립과 미학적 가치
1. 용어의 어원적 기반
마띠에르(matière)는 프랑스어로 '물질' 또는 '재료'를 의미하는 라틴어 'materia'에서 유래하였으며, 미술사적 맥락에서는 화면 표면의 텍스처 구현 기술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재정의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돌기를 넘어 작가의 제스처가 응축된 시각적 언어 체계로 기능하며, 관람객의 촉각적 상상을 자극하는 감각적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유화물감의 점도와 건조 속도를 조절하는 매체(medium)의 개발은 마띠에르 표현의 가능성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 테레빈(thinner)과 아마인유(linseed oil)의 혼합 비율 조정6, 모래·석고·아스팔트 등 이질적 재료의 도입은 화면에 입체적 레이어를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장 뒤뷔페가 1946년 선보인 '오트 파트' 시리즈는 2cm 이상의 두께로 물감을 적층하며 회화의 조각적 차원을 개척한里程碑적 사례이다.
2. 시각예술에서의 구조적 기능
마띠에르는 색채(color)와 구성(composition)과 더불어 회화의 3대 구성 요소로 인식되며, 이 삼각구도는 작품의 정서적 강도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얇게 번진 투명막(glazing) 기법이 은은한 서정성을 전달한다면, 두꺼운 임파스토(impasto)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가시화한다.
김태호 작가의 <내재율> 연작에서 확인되듯, 물감층의 물리적 가공(절삭·조각)은 화면에 제3의 차원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한 표면 장식을 넘어 시간의 축적 과정을 가시화하는 고고층서적 접근으로, 작품 자체가 생성·변형·파괴의 고고학적 기록으로 기능하게 한다.
Ⅱ. 역사적 전개와 양식적 변용
1. 근대 이전의 전사적 단계
르네상스 시기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유채기법 개발은 마띠에르 표현의 초기 형태를 제공했다. 투명 막층을 중첩하는 글레이징 기법은 후광 표현에서 빛의 굴절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으며6, 이는 물감의 광학적 특성에 대한 체계적 이해의 시작점이 되었다.
17세기 렘브란트(Rembrandt)는 두꺼운 물감층(paste)과 박막 처리(scrumbling)를 결합하여 피사체의 질감 차이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특히 <야경>에서 갑옷의 금속성 반사 효과를 내기 위해 팔레트 나이프로 백색 안료를 찍어내는 기법은 조형적 텍스처 연구의 선구적 사례로 평가된다.
2. 현대적 전환: 앵포르멜에서 액션 페인팅까지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은 마띠에르를 전위적 표현의 주요 수단으로 부각시켰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는 인디안 잉크에 의한 자동기술적 붓터치로 무의식의 흔적을 포착했으며, 장 폴리오(Jean Fautrier)는 <인질> 연작에서 석고와 유화물감을 혼용해 전쟁의 상흔을 물리적 돌기로 재현했다.
동시대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드립 기법(drip painting)으로 수평면 위에서의 물감 중첩 가능성을 탐구했고7,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r)는 산업용 에나멜 도료를 도입하여 기계적 질감을 구현하며 마띠에르의 재료적 범위를 확장시켰다.
3. 한국 현대미술의 수용 양상
1970년대 모노크롬 회화에서 박서보·하종현은 한지에 아교 번짐을 제어하며 전통 소재의 텍스처 잠재력을 발굴했다. 최근에는 이강소 작가가 <風來水面時>에서 수묵의 번짐과 유화 임파스토를 융합하여 동양적 공간 인식을 재해석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디지털 기술과의 접목은 아트앤에디션의 '마띠에르 판화'에서 확인되듯, 3D 스캐닝과 UV 프린팅 기술이 원작의 물리적 질감을 94.7% 재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오리지널리티의 개념을 재고하게 하는 기술혁신으로, 예술적 가치의 복제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다.